무릎이 아파왔다. 찢어진 무릎 부분 바지를 들추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른쪽 무릎 전체가 까져서 피가 고여 있었다. 점점 더 쓰라리고 아파왔다. 손수건으로 핏물을 찍어내며 두 다리를 주무르며 두드리며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는 내 주위로 벚꽃 잎이 난분분 난분분 바람에 날렸다.

(머니파워=황진교 ) 지구가 생긴 이후로 단 하루도 똑같았던 날씨는 없었듯이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온 그 어떤 날도 똑같은 날은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이성으로도 제어가 힘든 감정은 말해 무엇할까. 그날 아침이 유독 그랬다.

주말에는 파주까지 가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고 왔다. 타샤의 정원이라는 유럽풍의 레스토랑에서 정갈하고 맛있는 한식 코스요리를 먹고 자연의 봄보다 더 화려한 봄을 치장해 놓은 대형 베이커리카페에서 맛있는 빵과 커피를 마시고 이른 저녁으로 감자탕까지 먹고 들어왔었다. 이틀 전에는 러닝 10킬로 완주도 너끈히 해냈다. 전날에는 예약한 아들방 블라인드 A/S도 잘 받았다. 지난해 8월 재래시장 커튼집에서 거실과 베란다와 방방의 커튼과 블라인드를 했는데 천장에 박아놓은 아들방 블라인드의 나사가 느슨해져서 너덜거렸다. 베란다를 확장한 곳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아침 일찍 오신 사장님이 금방 뚝딱 원상 복구해 주셨다. 공구를 정리하시는 사장님에게 A/S 기간은 언제 까지냐고 농담처럼 물어보았더니 블라인드가 나달나달 낡아 못 쓸 때까지라고 웃으면서 다정하게 말씀해 주셔서 기분이 좋았었다.

그런 일상적인 날들을 보내고 맞이한 그날 아침은 어쩐지 감정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감정이 그러니 몸까지 무거웠다. 이것이 무기력이고 권태인가 싶었다. 여전히 사회의 일원으로서 경제활동을 지속하며 너무나 활기차게 열심히 사는 친구들을 만나고 와서일까 싶기도 했다. 나만 뭔가 잘못 살고 있는 건가... 나만 태만하고 게으르게 사는 건가.. 또다시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는 건가 하는 회의가 엄습해 왔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이 권태를 동반한 회의에는 참 속수무책이다.

그런 감정을 단속하듯이 운동화끈을 단단히 메면서 소년처럼 다짐했다. '이럴 때일수록 달려야지... 10킬로 목표를 달성하고 땀을 쏟고 나면 이런 감정쯤 사라질 거야... 파이팅... ' 엘리베이터를 버리고 계단을 선택해 내려가면서 마지막 파이팅! 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조용히 외쳐 보았다.

꽃샘추위가 물러난 거리는 봄기운으로 부드럽고도 활기찼다. 차도에는 자동차가 빼곡하고 거리에는 한껏 가벼워진 옷차림의 행인들이 분주했다. 버스정류장에 모인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리고 횡단보도에 모여 선 사람들은 신호를 기다렸다. 다소 피곤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망설이지도 않고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기다리거나 걸었다. 트레이닝복과 야구모자와 운동화와 이어폰을 꽂은 나는 걸으면서 계속 두리번거렸다. 무얼 찾으려는지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건지 나는 계속 두리번거렸다.

빨간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 앞에 들어서려는 찰나에 삐끗, 기우뚱... 넘어지려다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왼쪽 발목을 접질렸다. 화단 쪽으로 가 기대서서 발목을 돌리고 주무른 후 걸어보았다. 접질린 발목이 힘을 쓰지 못했다. 녹색불로 바뀌고 사람들이 우르르 건너갔다. 나도 절뚝거리며 건넜다. 돌아갈까 더 걸어볼까 생각하면서 걸었다. 걸음을 멈추고 발목을 돌려보다가 돌아갈까 좀 더 가볼까 생각하면서 또 앞으로 걸었다. 몇 번을 그렇게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 보았더니 괜찮아진 것 같았다. 평소 걸음을 되찾아 천변을 향해 걸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서 달리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몸의 컨디션은 불안한데 달리고 싶은 욕망은 오히려 더 커졌다.

접질렸던 발목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천천히 달려 보았다. 괜찮은 것 같았다. 발목은 괜찮은 것 같은데 어쩐지 몸이 무거웠다. 평소에도 3킬로 정도는 몸이 풀리느라 다소 무겁고 힘들었으니까 3킬로만 달리면 그 이후론 괜찮아지겠지 생각하며 천천히 달렸다. 벚꽃이 바람에 분분히 날리고 산책로엔 벚꽃 잎이 점점이 내려앉았다. 노란 개나리와 하얀 조팝나무꽃이 조화로웠다. 넓은 하천변에는 쑥과 냉이가 포함된 녹색의 풀들에 점령당해 있었다. 해묵은 누런 풀들을 몰아낸 녹색의 풀들이 점령지 군인들처럼 와아아아 함성을 질러대는 것 같았다. 아련한 연둣빛이었던 하천가 수양버들 가지들마다 오종종종 돋아난 새 잎들이 연두연두 하면서 재잘대는 것 같았다. 오리가 물속으로 자맥질하는 소리가 들리고 저 멀리 왜가리는 그날도 저 혼자 고고했다. 나는 그러니까 봄 속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아름다운 것들은 보고 있으면 안타깝고 슬퍼졌다. 나는 그 안타깝고 슬퍼지는 감정이 싫어서 한 때는 아예 봄을 외면하고 살기도 했었다. 봄이라고 봄봄봄봄 탄성을 지르는 친구들에게 흥! 난 봄이 정말 싫어!라고 사춘기 소년처럼 반항하고 노인처럼 심술을 부렸다. 그런데 정말 나는 이제 나이가 들었나 보군... 봄을 말이야... 외면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달리면서도 눈을 떼지를 못하네... 그렇게 스스롤 비아냥거리기도 하며 3킬로를 달렸을 즈음이었다.

몸이 휘청, 하고 중심을 잃었다.

나는 단단한 시멘트 바닥에 넘어졌다. 넘어지자마자 반사적으로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바로 일어나 앉았다. 처음 느낀 것은 넘어지면서 반사적으로 짚은 두 손바닥의 화끈거림이었다. 시멘트에 쓸려 화끈거렸지만 피는 나지 않았다. 오른쪽 무릎의 바지가 찢어졌고 무릎이 까져 피가 맺혀 있었다. 뼈가 부러지진 않았겠지 생각하면서 일단 몸을 일으켜 보았다. 온몸의 관절들이 삐그덕거리는 것 같았다. 고장 난 로봇처럼 겨우 일어나 가까운 벤치로 가서 앉았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시간은 아니었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무릎이 아파왔다. 찢어진 무릎 부분 바지를 들추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른쪽 무릎 전체가 까져서 피가 고여 있었다. 점점 더 쓰라리고 아파왔다. 손수건으로 핏물을 찍어내며 두 다리를 주무르며 두드리며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는 내 주위로 벚꽃 잎이 난분분 난분분 바람에 날렸다.

문득 울고 싶어 진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불안하고 넘어지고 까져서 아프고 피나는데 봄 너는 그저 아름답기만 하구나... 백치 같은 봄...

울고 싶은 마음으로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눈물은 나지 않는데 울고 싶은 마음을 안고서 절뚝절뚝 걸었다. 10분 거리의 집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절뚝이며 걷는 게 힘이 들어서 인도 옆 작은 공원에 들어갔다. 그곳도 봄꽃이 만개해 있었다. 아침바람은 잠잠해졌고 햇살은 환하고 따뜻했다. 무릎은 통증을 동반하여 점점 더 쓰라려 왔다. 넘어지면서 짚은 왼쪽 팔목의 손가락이 쥐가 나서 뻣뻣해졌다. 왼쪽 손목과 손가락을 주무르며 피가 맺힌 쓰라린 무릎을 호호 불며 한 시간이 넘도록 앉아 있었다. 노란 조끼를 입고 한 손에는 비닐봉지를 한 손에는 집게를 든 공공근로 노인이 미끄럼틀 밑에 앉아 꼬닥꼬닥 졸고 있었고 재활용품을 포인트롤 바꿔주는 기계 앞에는 자전거에 페트병을 한 꾸러미 싣고 온 젊은 여자가 페트병을 기계에 계속 넣고 있었다. 그 뒤로 또 한 명이 페트병 꾸러미를 가지고 와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란 조끼를 입은 공공근로 노인들이 여러 명 쓰레기봉투와 집게를 들고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때마침 미끄럼틀 밑에 몸을 숨기고 졸던 노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봄꽃들은 부지런히 피고 지고 사람들은 부지런히들 살았다. 나는 계속해서 왼쪽 손목과 손가락을 주무르며 일어섰다.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오히려 몸이 더 뻣뻣해진 것 같았다. 힘겹게 절뚝이며 공원을 나와서 약국에 들러 파스와 연고와 붕대를 사들고 절뚝절뚝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갈수록 접질렸던 왼쪽 발목이 부어오고 넘어지면서 짚었던 왼쪽 팔목도 부어오르며 힘을 못 쓸 정도로 통증이 심해왔다. 생각해 보면 걸려 넘어질 장애물 하나 없이 잘 관리된 산책로였고 내가 발을 헛디뎌 내 발에 걸려 넘어진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접질린 왼쪽 발목이 힘을 쓰지 못해서 넘어진 것 같았다. 횡단보도에서 발목을 접질렸을 때 그냥 집으로 왔었다면 이후 더 크게 넘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건 어쩌면 오늘은 그만 돌아가라는 우주의 신호였을 수도 있는데 그걸 무시했다.

봄 때문에... 봄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두리번거리다가 그만...

친구가 어쩌다 넘어졌냐고 묻는데 준비하지도 않은 대답이 이렇게 나왔다. 생각해 보니, 생각할수록 그 대답이 정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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